출 4:1-17 (9/10/2024)
왜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히브리인들이 듣고도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니 말도 안 된다며 믿지도 듣지도 않을 것이라 하는가? 히브리인들이 우상에 잡혀있는 애굽 문화에 찌들어 버린 때문인가? 그러면 모세는 어떤가? 하나님께서 상세히 출애굽 agenda를 말씀하셨는데도 왜 여전히 부정적인가? 하나님께서 답답하셨던지 모세에게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신다. 40년 양 떼를 돌보며 필히 손에 들고 다니던 지팡이 아닌가?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니 모세는 곧 땅에 던진다. 그런데 그것이 뱀이 될 줄이야? 모세가 놀라서 피한다. 왜 피해? 광야에 다니면서 뱀에 익숙하지 않았던가? 뱀이 아니라 독사였나? 이번에는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신다. 모세 겁먹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다니.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무엇인가? 모세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의 하나님이 분명 나타나신 것을 믿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왜 또 모세의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나? 아연실색 의아해하던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 보니 손에 나병이 번져 눈같이 된다.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라 해서 그대로 하니 손이 멀쩡하다. 모세 충격받지 않았을까? 모세의 놀란 표정을 보시고는 처음 표적은 믿지 않아도 나중 것은 믿을 거라시며 만약에 이도 저도 못 믿으면 나일강 물을 퍼다 땅에 뿌려 피가 되는 것을 보게 하리라 하신다. 물이 피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무엇인가? 피? 피? 피가 열쇠인가? 예수의 피? 심판? 그런데 모세는 또 하나님 앞에서 뒷걸음질한다. 자기는 말을 어눌하게 하는 자라며 주신 사명 감당할 수 없다는 핑계(?)랄까? 두 번의 이적을 보고도 이럴수가? 왜?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하기에 덜컥겁이 났던가? 모세는 어찌 하나님 앞에 즉각 YES라 못하는 것인가? 무엇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어처구니가 없으신지 누가 입을 지었느냐? 내가 아니냐 하시며 이번에는 모세의 입에 함께 계셔 할 말을 가르치겠다 하신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연민인가? 아니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한 하나님 마음이신가? 그런데 또모세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며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 이쯤 되면 노발대발하셔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또 차선책을 제시하신다. 말 잘하는 형, 아론이 모세 대신 말하게 할 것이고 모세는 “하나님같이” 되리라 하신다. 아니 언감생심 어찌 “하나님같이”되다니? 모세의 Job은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면 되는 것이라...
성령 하나님은 오늘 모세 그리고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시는가? 나는 모세 size와 하나님 size에 직면한다. 자기 자신에 얽매어있는 모세 수준과 영광의 하나님 수준에서 모세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나는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으로 이끌려 가면서도 여전히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모세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닌가? 내가 모세처럼 하나님을 배워가고 있지 않은가? 질풍노도(?) 같은 나의 삶의 여정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려는 것인가? 나와 영원히 사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닐가? 나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나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 나도 모세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 내 수준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있지 않은가? 끌어 내려오실 하나님이 아니시지만. 아! 나는 언제나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하나님 size를 언제나 터득할까? 그러나 오늘도 지치지 않으시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며 나의 시야를 하나님 수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 계셔 담대함으로 예배로 나아간다. 그리고 나의 영혼에서 나오는 감사와 찬양으로 내 영혼이 소리친다. 역시 하나님 한 분만이 최고!